- 장연변씨역사
- 장연변씨 유래
- 장연변씨 현조 편람록
- 성(性) '변' 字의 활용
- 분파도
- 항렬표
장연변씨 현조 편람록
○ 성씨유래
장연변씨 족보에는 시조 諱 有寧(유영)이 고려조 인종 16년 (1138) 송나라에서 공주 배신으로 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원주변씨 화수회에 의하면 황주변씨 족보에는 중국 농서땅에서 살았으며 북송이 망할 무렵 해동의 나라(한국)으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변씨는 고려 이전에 신라 토호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때부터 살았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보면
※ 변품(○品) : 관직은 장군(618년 신라진평왕 40) 이었으며 北漢山州 軍主 (북한산주 군주) 라는 장군으
로 백제와 싸워서 가잠성을 탈환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음
※ 변산(○山) : 관직 나마(奈麻) <장군> (672년 신라 문무왕 12) 역시 백제와 싸워 이긴 장군으로 기록
되어 있음
※ 변균지(○均知) : 신라때 고승 (923년 화엄종 수좌) 아버지는 변멸성(○懱性)이며 黃北方(황북방)
둔대엽 마을의 토호였다 갈고 기록됨
◎ 이상과 같이 사기에 나타난 신라귀족이었으며 고려조 이조에서도 혁혁한 현조가 빛을 냈었다.
장연변씨 시조나 원주변씨 시조가 중국땅으로부터 왔다는 족보사의 내력은 중국을 사대화했던 이조때의 사회풍토의 미화성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또는 신라토호족이 고려조에 이르러서 중국대륙과 교류하면서 그 세력으로 고려조에 벼슬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를 시조로 삼은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신라귀족으로 더 올라가 뿌리를 찾을수 있어서 다행이다.
근세까지만 해도 도탄선생의 임진란 공적, 통상곡 선조의 한때 웅비했던 행적이며 17, 18, 19세 연 삼효자의 거룩한 행적으로 장연변씨의 긍지를 높일수 있는 것은 비록 현세의 몰락된 형세이지만 우리들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더욱 분발하여 인물이 배출되고 업적이 찬연해지도록 협조하여 노력을 할 지어다.
一世 有寧(유영) 호는 石川(석천). 관직은 고려 공민왕때 재상(중문지후) 장연(연성)부원군에 봉하였음
三世 冲孝(충효) 관직 검교흥의위 장군
冲悌(충제) 관직 흥의위장군 (황주변씨 상계)
八世 龜壽(귀수) 호는 竹岡(죽강) 관직 중훈대부 준양유학교수 太師(태사-왕세자의 스승)
九世 處厚(처후) 호는 水亭(수정) 21세에 과거(乙科第二)에 장원급제 하였고 남양부사, 예문관 직제학을
거쳐 병조참판까지 하였고 명필 문장가로 당시에 이름을 떨쳤으며 중국사신
으로 수차 내왕하였고 외교문서를 전담하였음
十世 大海(대해) 관직 판선공감사 삼도감사(강원 충청 황해) 관찰사 (이태조의 증손녀서, 익안대군 芳毅
(방의)의 손녀서, 익평대군 石根(석근)의 사위였다.)
十一世 崑(곤) 관직 교하현감 (후손 적계장(의병장) 도탄공 士貞(사정)께서 고양, 안의를 거쳐
전북 남원에 안착. 낙남)
崙(윤) 관직 홍문관교리, 신천군수 (아들 진사공 以安(이안)께서 장흥 부산으로 낙남하였음)
十二世 以安(이안) 관직 성균진사, 정릉참봉 (장흥 부산 내안리로 낙남)
十三世 澄(징) 관직 신천군수
十四世 建中(건중) 장흥 관산 지북 이사
克中(극중) 순천으로 이주
就中(취중) 장흥 용산 관지 이주
執中(집중) 용계면으로 이주
※ 동 14세 宗派(종파)에서 士貞(사정) 도탄선생 남원이주
거제파 12,13,14,15세에 걸쳐 거제부사, 군수, 통제사 등의 관직배출
十六世 士紀(사기) 이조 인조때 무과에 등용되어 선전, 강음현령, 전라충청수사, 수원부사,
삼도통제사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통상공께서 당시 파주선산 성묘를
다니실 때 행차가 거창하고 훌륭하셨기로 교리공묘를 변장군 묘라고 칭송하였다는
말이 지금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부근 마을에서는 전설화 되어 있다.
十七世 應宇(응우) 孝子(효자) 정려문 조정에서 표창
十八世 萬里(만리) 孝子(효자) 정려문 조정에서 표창 (삼년거려)
十九世 鎭臣(진신) 孝子(효자) 정려문 조정에서 표창
이상 3대 효자가문이라는 칭송과 흠모를 받았고 장흥 관내 변씨 가문에 근세 명망을
높힌 자랑스런 선조이신데 불행히도 본손은 23세에 와서 絶孫(절손)이 되어 섭섭함을
금치 못하나 경우 入系(입계)를 하여 유지하게 되었다.
◎ 이와같이 시조이래 약 900년의 장구한 우리 씨족 역사를 가졌어도 현세에 와서는 침체운
속에 잠겨 몰락한 성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통탄함을 금치 못한다고 하겠다.
돌아다 보건데 지손파인 황주변씨는 장성일대를 거점으로 상당히 발전을 하고 있고, 원주 변씨는 서울, 경기, 부천 소사, 경상도 예천, 제주도 등 널리 번창하여 사회 각 부분에
상당한 진출을 하여 발전, 번영하고 있음은 다행하다 하겠으나 유독 장손파인 장연변씨는
지금 전국 통합하여도 300세대에 1,000여 인구에 불과할 정도로 쇠퇴할 뿐만 아니라
人文(인문)도 몰락하여 생각할수록 간장이 메어지는 통탄함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이는 결코 한때의 문운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들 자손 각자의 노력
부족으로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럴수록 우리 다같이 동족화목우애를 견지하고 이를 악물고 와신상담 분골쇄신의 피나는
노력과 자녀 교육열을 고양시켜 후진을 양성, 문운부흥의 전기를 쟁취할때까지 분발할 것을 다같이 다짐코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