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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변규상
작성자 관리자 [2023-04-06 1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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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급제까지 한 변규상, 손자 한권·한행
대상인물

변규상(邊圭庠)

1866~1895. 본관은 장연. 자는 군익(君益), 호는 원봉(圓峯). 장흥군 용산면 관지리 출신으로 장흥지역 전투에 참여하였고, 12월 15일 석대들 전투 이후 장흥읍 향양리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1895년 정월 22일 벽사역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됨.

증언인물

변한권(邊漢權)




1924~ . 변규상의 손자. 태평양전쟁 유족회 군속대표. 대동지기공업사(box공장) 대표이사. 한국방송통신대 기성회 이사 3년 근무. 현재 서울 거주.


1932~ . 변규상의 손자. 변한권의 동생. 장흥에서 활동중.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우선 변규상의 생활과 집안 내력에 대해서 변한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부님이 벼슬을 해가지고, 뭣이냐 즈그 아버지한테 참봉을 주고, 즈그 형님한테 선달을 주고, 그라고 재차 올라가서 급제를 했던 모양이여. 그런디 발령을 안 내. 그러고 있다가 갑오년 동란이 일어났는디. 벼슬까지 한 양반이 동학으로 활동을 했든가, 어쯔케 됐든가 몰라요. 자기도 불만이 있고. 벼슬은 했으나 발령을 내서 어디로 부임도 안 시키고. 그런 처지에 있었던가. 하여간 발령이 통 안 나버려서 부임도 못하고 동학에 가담해서 돌아가셨고. 고조부 때는 곤란했어요. 증조부님이 어떻게 해서 재산을 이뤄놨겠지.

이를테면 증조부 대에서 상당한 재산을 불려놓았고 조부 대에서 거기에 걸맞는 명예(?)를 획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향촌의 부농이 보여준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변한행도 역시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 일이라 정확한 석수는 모르지만, 밥은 먹고살 수 있을 정도는 된 것 같습디다. 조부님이 벼슬을 좀 했다고 그러는데 자세히는 모르지요. 선달 벼슬 하신 걸로 알고 있지요.

‘선달’은 벼슬이 아니요. 무과 합격자에 붙은 호칭일 뿐이다. 변한권이 말하는 할아버지의 처형에 대한 사실이다. 그동안 쉬쉬하고 지내는 통에 자세한 것은 모르고 지냈단다.

어려서 모르는디 우리 증조부님이 활동을 하시고, 조부님도 활동을 하셨나 어쨌나 몰라도, 조부님은 외가에 숨어있다가 즈그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내가 이렇게 숨어서 살어서 뭣하냐 같이 그냥 싸우러 나가 가지고 뭣이냐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지. 석대들이라고 장흥, 석대들에서 유지기를 씌워가지고 죽였다고 그런 말만 들었지, 아버지께서나 할머니께서도 일절 쉬쉬하고 통 그런 얘기를 안해버려요. 이자 여기저기서 조부님, 증조부님이 그러콤 정월달에 일주일 사이에 돌아가셨다 그런 말만 들였제, 통 쉬쉬했단 말씀이여. 부자간에 돌아가셨다는 말만 들었지.

증조부와 조부가 같이 관군에 처형당했다는 기구한 이야기다. 이때부터 집안이 절단된 것은 불문가지일 터. 변한행은 여기에 들은 이야기를 덧붙인다.

향양리에선가 피신해 가 있다가 그래가지고 돌아가시기는 어디서 돌아가셨는가 하면 석대들에서 돌아가신 거 같애. 거기서 돌아가셨다고 전해온 말이 있어 그렇게 알고 있지. 그런데 시신은 찾아오신 모양입디다. 그런 정도만 알고 있지 특별한 거시기는 모르고.

이어 변한권은 “우리 조부님 몸을 주겠다고 해서 신체를 찾아다가 묘를 써 놨는디, 우리 땅에다 썼다고 파내라고 해서 파내가지고, 다시 공동묘지에 썼다가 몇 년 후에 몰래 다시 우리 산으로 돌아왔지. 묘도 우리 땅에다 못 쓰게 했으니까. 그랬다는 얘기만 들었지”하며 부연설명 해준다. 할아버지가 농민전쟁에 참가하여 처형당하였다는 사실을 어렸을 적에 들은 정도가 전부인 변한권·한행 형제는 할아버지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들려주는 사실에는 약간의 오류도 포함되어 있어 그간 후손들의 삶이 사실 확인에 여유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음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당시 석대들 전투 이후 체포된 장흥 농민군은 대체로 유지기[짚꼬깔]를 씌운 채 갑오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정월에 걸쳐 벽사역[일부는 장대(將臺)에서 처형]에서 포살당하여 무참히도 불태워졌다. 따라서 변규상이 유지기를 쓴 채 처형당했다는 증언은 역시 변규상도 벽사역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약 1천여 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흥 농민군의 상당수가 이렇게 벽사역에서 처형당하였는데, 그 후 벽사역졸은 장흥군민으로부터 원한의 표적이 되었다 하며 심지어 벽사역 부근에 사는 사람들과도 사사건건 대립이 되었을 정도라 하니 장흥 농민군 후손들의 통한을 짐작할 수 있겠다. 거기에다 후손들은 선조의 활동에 대해 입다물고 지내야 하는 이중의 고통까지 짐져야 했으니 후손들의 증언 하나하나는 최근 우리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재삼 확인해주고 있을 뿐이다. 변한행의 이야기다. “말하자면 반란이라고 해서 어디다 내세우들 못하고 우리 자손들은 말을 못했어요. 그러나 이것이 다시 뒤집어지니까 얘기하데….” 그러니까 최근에 상황이 뒤집어져(?) 증언이라고 하여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관계로 그동안 후손들의 생활이 그럭저럭 살았다면 형편이 좋은 편에 속한다.

조모님이 혼자서 고모님 한 분은 낳아서 기르시고 아버님은 유복자지. 제삿날은 정월 스무이튿날. 우리 아버님이 갑오[1894년]생이여. 아, 막 낳아 가지고 그러셨구나. 갑오년에 낳고 을미년[1895년]에 돌아가셨구만. 그러니까 우리 조모님이 상금 백씨거든. 그란게 순전 자기 친정에서 많이 도와주고, 그전에 조금 농사마지기나 떼어가지고 나와서 살았지요. 그래도 세를 이루고 자식들 기르고 그러고 살았지요. 조모님이 참 고생하셨지요. 원래 옛날에는 그것이 나쁜 것이고 자랑할 말이 못 되기 때문에 말씀을 통 하시질 않았지요. 간접적으로 내려온 말만 우리가 알고 있지.

가장이 불귀의 객이 되면 모든 것은 여자의 몫이 된다. 변한행의 조모도 그러한 생활의 짐을 단단히 지고 세파를 헤쳐나가야 했던 농민군의 아내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커온 농민군의 후손 중에는 그들의 피 속에 선조의 투쟁이 뜨겁게 남아있음인지 그 후 한국 근현대사의 소용돌이에 또다시 뛰어드는 인물들이 속출했다. 변한행이 들려주는 한국 현대사와 관련된 제2의 희생이다.

옛날 어른들한테 말을 듣는다면 그 후에 좌익이 나와가지고 육이오가 났지 않소 그때도 우리 집안에서 몇 분이 돌아가셨어요. 좌익으로 해서. 그란디 타성 어르신네 말씀하신 것은 옛날에도 저 집안에 그런 사람이 있더니 또 있다 이런 정도로 얘기했지요. 우리 집안에서 육이오 때 좌익을 하시다가 네 명인가 돌아가셨지. 면내에서 활동을 했지. 그때는 웬간하면 거시기 안했소. 휩쓸려서 많이 했지.

변한권도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농민군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위험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인공 전에 좌익 우익 갈라져가지고 사람들 죽이고 그러는 판에, 뭣이냐 우리 마을에 김씨라고 우익 열렬한 사람이 있단 말이여. 그런데 나를 무단히 갑오년 동학 때 부자지간에 돌아가신 양반의 손이라고 그래가지고 좌익으로 몰고 그랬어. 좌익패, 동학의 줄기라고. 그런 내가 묘한 소리도 듣고. 그라고는 뭐 활동하고 그런 얘기는 없고.

좌익 아닌 좌익으로 몰리기도 했던 변한권은 일제 때도 남다른 경험을 하였는데, 잠깐 그의 기구한 이야기를 옮겨보자.

일제 때 해군 군속으로 강제로 붙잡혀 갔어요. 남양 마샬군도 최전방까지 갔지요. 거그서 일년 기한하고 간 것이 삼년 만에 나왔지요. 보급이 떨어져가지고, 순전히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아주 극심한 고통을 받았지요. 그래가지고 결국에 가서 나중에는 미국놈들 후방이 되어버렸어요. 이 섬을 안 먹고 앞에 가서 징검다리 놓듯이 묵어들어간께. 우리는 미국 사람들 후방이 되어버려가지고. 즈그들이 선전삐라를 뿌려대는디, 느그가 항복을 안하면 이 섬을 불을 질러서 태와버리겠다고. 과일 따먹고 풀잎 뜯어먹고, 과일도 며칠 가요? 며칠 못 가지. 그러니까 풀잎 뜯어먹고 사는디 풀잎조차 태워버린다 그것이여. 그러니 항복을 해라. 아 일본놈들이 하게 해요, 못하게 하지. 그러니까 날마다 공습, 날마다 정찰기가 돌아댕기지. 고기 잡아먹을라고 바다에 물이 쪽 빠진 때는 고기 잡으러 바다를 나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 배가 느닷없이 달라들면 그냥 안 타면 위협을 하니께 타기도 하고, 마음이 있어서 타기도 하고 나는 방송, 한국사람이 배를 타가지고 염려말고 나오라고 하는 통에 옆으로 도망을 갔지. 도망가서 배를 타고, 구조선을 타고 같은 남양이지만은 메지르라는 섬으로 가가지고 거기서 한 달 더 있다가 하와이로 가서 하와이 수용소에 있다가 해방되고 나왔지. 수용소에 가 있다가 육개월 만에 해방이 돼서 간신히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왔지요. 얘기를 할라면 한정이 없고, 머리가 아파.

나라 없는 설움을 단단히 경험했던 변한권, 남의 장단에 끌려가 전쟁포로 신세까지 된 그로서는 그때의 상황을 떠올린다는 것은 정말 머리 아픈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 후 변한권은 살기 위해 이런저런 일에 손을 대다가 이제는 쉬고 있단다.

인공 지나고 자유당 때 면에 딱 삼년 댕기고, 나와서 정미업 하다가 실패해서 망해갖고, 서울 와서 시방 근근이 살고 있어요. 지금은 놀고 있소. 여그 방산시장에서 요런 박스 공장을 근 이십 년간 했어요. 허다가 정신이 사납고 못하겠어서 집어친 제가 한 칠팔 년 되야 갈까.

이제 역사가 뒤집어진(?) 상황에서 변한권·한행 형제의 조그마한 소망이라면 조부를 대명천지에 신원하는 것이다. 지금 국가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가유공자를 선정하고 있으나 현재 의병운동에까지 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에서 나온 자료집에도 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를 인정하고 있는 마당에 농민군을 외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므로 농민군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국가유공자로 대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농민군 유족으로서 변씨의 소망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대세에 따른 시간문제로 보고 싶다.

돌아가신 양반의 누명이나 벗어지는 것이 좋지 않느냐. 그것이 우리 자손들로서는 상당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지대로 못 돌아가셨다는 것이 상당히 억울했지요. 우리 자손들은 기왕이면 이게[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 계속 존속되어 가지고, 명예회복이라도 됐으면 좋겠지요.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탑 세울 때] 나는 단순히 그것이 이방언 선생탑만 된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이 아니드만요. 우리가 전부 협조해서 할 일이다 그렇게 느껴집디다.

농민군의 명예회복이 “우리가 전부 협조해서 할 일이다”고 느꼈다는 변한행의 말은 그동안의 어두운 기억을 말끔히 떨쳐버리고 힘차고 밝게 살아가겠노라는 자신의 새로운 결의를 보여주는 것 같아 대단히 인상적이다.

 

-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증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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