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목 | 효행으로 이름을 떨친 부자- 변응우, 변만리의 효자문 표장 - 청송부사 이규보의 글 | |||
| 작성자 | 변성관 [2026-03-18 15:32: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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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변응우 부자에게 내려진 효자문에 기록된 청송부사 이규보의 글이다. 가능하면 현대의 젊은이들도 읽어서 알 수 있도록 표현을 순화하여 번역하였다. 즉 직역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뜻이 통하면 의역을 하더라도 젊은 층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여 번역하였다. <역자 : 변성관>
孝子學生邊應宇之門 효자 학생 변응우의 효자문 崇禎紀元後三癸酉通訓大夫靑松府使李珪輔奉敎書 숭정 기원 후 세 번째 계유년(1753년 - 조선 영조 29년) 통훈대부 청송부사 이규보가 교지를 받들어 글을 쓴다.
邊公行狀 변공의 행적에 대해 기록한 글 公諱應宇字重遠號竹圃姓貫長淵兵曹參判處厚之八代孫觀察使大海 공의 이름은 응우이고 자는 중원이며 호는 죽포이다. 본관이 장연이며, 병조참판 변처후의 8대손이고 관찰사 변대해의
之七代孫校理崙卽六代祖也是後累世不振遂落南居長興而能修飭家 7대 손이다. 교리공 변륜이 곧 그의 6대조이다.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가세가 부진하여 마침내 남쪽 고을로 내려와 장흥에 살게 되었으나, 가문을 잘 다스려 선비 집안의
行不失儒名祖諱德獜考諱衛漢公生於甲申正月至丙子二月乃不勝喪 명성을 잃지 않았다. 조부의 이름이 변덕린이고 아버지가 변위한이다. 갑신년에 태어났으며, 병자년 2월에 귀천하였다.
棄世壽菫五十三公稟性根於孝自孩提時已知敬愛父母異於凡兒及長 당시 53세였다. 공은 품성이 효심이 깊어 어린 아이 때부터 이미 부모를 공경으로 아낄 줄 알았으며, 장성하여서는
恭事奉養之節未不致極殫竭誠孝無違禮節慈夫人病篤血指灌下得甦 공경으로 부모를 섬기고 봉양하는 예절이 극진하지 않은 바가 없고, 진실한 효의 도리를 다하여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모친의 병환이 깊어지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이를 모친에게 드시게 하여
數日及遭喪哀毁澈天弔者感動鎭日往哭於墓墓在五里外雖大雨雪未 수일 동안 소생하게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그 슬픔과 애통함이 하늘에 닿을 정도여서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감동하였다. 종일 묘에 가서 곡을 하였으며, 묘가 오리 밖에 있었지만, 비나 눈이 많이 내려도
嘗廢焉去路成蹊哭地成坎鄕鄰咸稱其孝逮丁外艱易戚備至居廬墓下 이를 빼먹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의 집에서 모친의 묘소까지 그가 오가며 밟아서 새로운 길이 생기고 그가 엎드려 통곡한 자리가 움푹 패일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그 효행을 칭찬하였다. 이처럼 아비 상을 당하여 그 예와 정성을 극진하게 다하였다. 여묘에 머물면서
晝夜攀號餟粥三年家人亦皆感化行素苟非誠孝之篤至能如是乎方其 밤낮으로 아비를 소리쳐 부르며 통곡을 하고, 아비 잃은 슬픔에 삼 년간 죽만 먹으니, 집안 사람들이 모두 이에 감화되었다. 평소 참으로 지극하고 돈독한 효심이 몸에 배어있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侍疾夜不解帶飮啖臥起躬自扶將至累年而一心靡懈齋沐禱天願以身 바야흐로 어미가 병중에 있을 때에는 밤에도 의관의 허리띠를 풀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이며 눕고 일어나는 것을 몸소 옆에서 거들기를 장차 여러 해에 이르렀으나,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목욕재계하고 어미를 낫게 하고 자신이 병을 대신하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代病中思食之物至誠覔奉多有孝感之應鄕人比之於雪笋氷鯉也盖孝 병중에 먹고 싶다고 하는 음식은 지성으로 구하여 봉양하여 그 효심에 하늘이 감동한 일이 여러 차례였다. 향리 사람들이 이를 효심이 깊어 겨울에 죽순을 얻고 얼음 속에서 잉어를 구하였다는 옛일에 비견할 만하다고 칭송하였다. 대개 효도는
者百行之源而公之誠孝如是出天故一邑擧狀請襃彰道伯乃據實行上 모든 행실의 근본인데 공의 지극한 효심이 이처럼 하늘이 내린 듯하니, 고을의 모든 이들이 추천하여 표창할 것을 청원하자 관찰사가 그의 행실을 근거로 하여 임금께
聞旌閭噫公以簪纓後裔淪落遐鄕世守儒業克有內行事父母盡誠居喪 아뢰어 효자문을 내리게 하였다. 아! 공은 지체 높은 양반의 후예이나 가세가 기울어 먼 지방에 살지만, 선비의 도리를 대대로 지켜오며 마음가짐과 행실을 잘 다스려 왔다. 부모를 모심에 정성을 다하고 상을 당하여서는
澌毁遂至滅性百載之下冊楔煌煌人皆表式且公之子萬里能趾其美亦 몸이 몹시 상하여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도록 애통해하였으니, 그 효행에 대한 글과 기록이 수백 년이 지나도 찬란하여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공의 아들 변만리도 아비의 발자취를 밟아
以孝聞幷載於新增輿地勝覽可謂有是父有是子也萬里字汝長號梧軒 효로써 이름이 나서 부자가 나란히 신증여지승람에 실렸으니, 이야말로 그 아비에게서 그 자식이 났다고 할 만하다. 변만리의 자(字)는 여장이고 호(號)는 오헌이다.
子鎭臣鎭杰女朴重純李光一皆幼學鎭臣子光梯鎭杰子光祐二子幼光 아들로는 변진신, 변진걸이 있고, 여식 둘은 박중순과 이광일에게 시집갔으며, 이들은 모두 유생들이다. 변진신의 아들은 변광제이고, 변진걸의 아들은 변광우인데, 두 아들은 아직 어리다.
一子弘徵墓在府南安台洞丙坐之原配海州吳氏景喆之女附左余於公 이광일에게는 홍징이라는 아들이 있다. 공의 묘는 장흥부의 남쪽 안태동 병좌에 모셔져있다. 부인은 해주 오씨이며 오경철의 여식이다. 부인은 공의 왼쪽에 묘를 모셨다.
有戚誼而鎭杰千里遠訪懇請述行不揆蕪拙据其家狀摭實謹述焉 나와 공은 친척의 우의가 있어서 변진걸이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찾아와 청하니, 거친 솜씨를 무릅쓰고 그 집안에 내려오는 기록에 근거하여 사실을 가려 뽑아 삼가 글을 쓰노라.
崇禎紀元後三乙亥三月日 숭정 황제 재위 이후 세 번째 을해년(1755년)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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