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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묘년(1831년) 발행한 족보의 서문
작성자 변성관 [2026-02-16 1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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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년(1831년) 발행한 족보의 서문 

 

 

겨레는 씨(성과는 다른 개념으로 지금의 본관과 비슷한 의미임)로 구별되고 겨레는 모두 족보가 있는데, 족보란 그 성씨의 겨레붙이를 적어 계보를 만든 것이다.  이에 주나라의 관직 중 소사(주나라에서 나라의 기록을 맡은 관직)직을 설치하여 계보를 밝혀 조상을 높여 우러르는 도리를 알게 한 것이다. 한 사람으로부터 백 대가 갈라져 나오니, 삼족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구족에 이르게 되면 계파의 앞뒤를 족보가 아니면 어찌 알 수 있겠으며, 제사 때 조상의 신위를 놓는 차례(과거에는 윗대의 조상부터 신위를 놓는 위치가 차례지어져 있었음)를 족보가 없다면 무엇으로 살필 수 있겠는가? 친함이 다하면 정이 다하고 정이 다하면 길거리에서 스쳐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으니, 참으로 문헌의 기록이 있어서 분파가 하나의 근원에서 갈라져 나오고 여러 가지가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주나라에서 소사라는 관직을 만든 이유이고 족보에 관한 학문이 생겨난 까닭이다. 우리 겨레는 중국에서 나왔으니, 한 번 전하여서는 아들이 되고 재차 전하여서는 변씨가 되었음은 옛 선인들이 갖추어 기록한 바이다. 아! 우리 변씨는 본래 중국의 지체 높은 문벌로서 해동(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으로 넘어와 귀족의 지위를 세습하고 모두 아름다운 덕을 갖추어 그 명성이 고려 왕조에서 드높았으니, 곧 재상공과 동정공은 충성과 신의로서 선조들의 충심을 이을 수 있었고, 검교공과 전의공은 문장과 품행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죽강선생께서는 지난 왕조(고려왕조)의 충신으로 마침내 두문동에 들어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를 지켰다. 이번 왕조(조선왕조)에 들어서서는 수정선생께서 뛰어난 문장력과 높은 덕망으로 두루 높은 벼슬을 하여 관직이 아경(조선시대에 종2품 벼슬을 높여 부르는 말)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인 현감공 '곤'과 교리공 '륜'이 있어서  남원 변씨와 장흥 변씨의 중시조로 받들어졌다. 그 후 여러 계파에서 나온 충효와 도덕이 높고 문장이 뛰어난 인물의 경우는 고려왕조의 역사와 조선왕조의  기록에 올라있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니, 가문에서 따로 적어 놓지 않더라도 뚜렷이 알 수 있으니, 따로 족보를 다듬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근대 이후 가문의 기운과 업적이 쇠락하고 선조처럼 높은 벼슬아치를 배출하지도 못하게 되어 당대에는 가문의 명성이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사는 곳이 제각각 달라지게 되었는데 문헌을 통해  적어 놓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겠으며, 어찌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차례를 알 수 있겠는가? 우리 변씨 족보에 오른 후손이 대대로 서로 공경하고 우애하여 효제(부모에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함)의 진심을 잃지 않는다면 이것이 곧 일 만명의 마음이 하나요, 십리 안이 모두 한 집안이라는 옛말과 같은 것이다. 이 어찌 육기(호가 사형이다. 진나라 당시의 문인이자 오나라 육손의 손자임)가 가문의 덕을 세상에 높이고 소순(그의 호가 노천이다. 중국 북송의 문인으로 소식, 소철의 아버지임. 소식 소철이 엮은 족보가 당대와 후대에 족보의 모범적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함)이 집안의 족보를 엮은 본뜻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옛 왕조 중엽에 우리 변씨의 한 유파가 송도에 흩어져 살았다고 하는데, 이제는 남과 북이 동떨어지고 길이 멀어져서 모든 종족의 명단을 함께 수록하지 못하니, 효도와 우애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에 상심이 깊을 뿐이다. 족보를 발행함은 멈출 수 없는 일이라 미약한 후손이 갖은 애를 써왔으나 세월은 흐르고 일은 늦춰지니 자손의 우울한 마음이 어떻다 하겠는가?  이제 감히 주제넘게 간략히 글을 써서 훗날 족보를 간행할 때 참고로 삼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약한다.  

 

순조 임금 재위 31년 신묘년 7월 하순

후손 최하가 삼가 쓴다.

 

현대어 번역 : 변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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