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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축년(1817년)에 발행된 족보 서문
작성자 변성관 [2026-02-15 1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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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축년(1817년)에 발행된 족보의 서문

 

  족보는 왜 만드는가? 아비가 낳으니 아들이요, 아들이 낳으니 손자인데, 자자손손 삼족부터 구족에 이르기까지 같은 선조의 핏줄이 아닌 사람이 없다. 그러나 세대가 멀어지고 족보가 갖춰지지 않으면 선조의 자와 휘(높은 사람의 이름을 높여 부르는 말), 세대의 앞과 뒤, 제사 때 신위를 모시는 순서 등을 후손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조상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계파가 어디에서 갈라져 나왔는지 또한 어찌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족보를 저술하는 뜻이 지극한 것이다.

 

  아! 우리 변씨는 중국으로부터 출래하였으니, 수성도(성씨의 유래를 간략히 표시한 도표)를 살펴보면, 황제(중국 고대의 전설 상의 제왕으로 헌원씨라고도 한다)의 후예이다. 황제 때부터 계(은나라=상나라의 제왕) 때에 이르러서는 상나라에 봉해졌고 그 후 27세대가 흘러 미자계 때에는 송나라의 군주로 봉해졌다. 이 때로부터 20세대가 흘러 어융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의 자가 자변이라서 후손들이 '변'을 성으로 삼았고 대대로 농서 지방에 근거를 두고 살았다. 그 후손 중 휘가 '경'이라는 분은 송나라에서 벼술을 하였는데 관직이 '문하습비후' '대아찬'에 올랐고, 휘가 '중량'인 그의 아들과 휘가 '인'인 그의 손자가 모두 벼슬이 병부상서에 올랐다. 4세인 휘가 '유녕'이란 분은 송나라 조정의 판동서로서 고려 인종 무오년 공주배신(원나라의 공주가 고려의 왕과 혼인할 때 공주를 모시고 고려로 건너온 신하)이 되어 고려에 건너와서 '중문저후'의 벼슬을 하고 '장연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장연을 관향으로 삼았으니 이로부터 비롯된 일이다.

 

  또한 황주 변씨와 원주 변씨가 있는데, 황주 변씨의 세보에 따르면, 변경을 도읍으로 삼은 송나라가 망한 후 바다를 넘어 동쪽으로 건너온 이가 취성에 살았는데, 취성이 지금의 황주라 그 후손들이 황주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원주 변씨의 족보에 따르면 변씨가 심양에서 대대로 송나라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휘가 '안열'이란 분이 계셔서 지정(중국 원나라 순제 때의 연호) 11년 '노국공주'를 모시고 고려에 들어왔는데 원주의 수조권(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한)을 받았기에 그 자손들이 원주를 관향(본관으로 삼는 지방)으로 삼았다. 아! 세 변씨가 모두 중국에서 비롯하였으니, 그 근본이 같은 조상이요 그 유래가 같은 나라이라. 족보를 함께 함이 마땅하나, 세대가 멀어지고 병화(전쟁의 불길)를 여러 차례 겪어 세 계파의 가문에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지고 누락되어 족보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안타까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부족한 후손이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중국 역대의 기록을 모아 살펴보고 동국의 여러 고려 사적를 참고하며 가문에 전해지는 문적을 수집하여 족보를 엮어내어 장연변씨족보라 그 이름을 붙였으니, 선조를 잊지 않고 후손들이 화목하게 살고자 하는 뜻을 모은 것이다. 애석하구나. 우리 혈족이 그 수가 너무 적어 재정을 마련하기가 어려워 인쇄를 기약하기 어려우니 더욱 통한을 금할 수 없다. 드디어 서문을 지어 권두에 붙여 족보 간행 때 참고할 자료로 삼고자 한다. 

 

순조 재위 17년 정축년 음력 구월 하순

 

불초한 자손 '훈'이 삼가 기록한다.

 

 

현대어 번역 : 변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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