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연변씨인물조선시대
조선시대
제목 역모로 몰려 처형당한 변사기 장군
작성자 변성관 [2026-03-16 10:56:14]
첨부파일
첨부된파일갯수 : 0

변사기(邊士紀)

 

   족보의 기록 : 인조 재위 기간 중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우후(宣傳虞候)와 강음현령(江陰 縣令) 전라충청수사(水使) 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삼도통제사 겸 경사우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무자년(1648)에 수정공(水亭公 변처후)의 시집과 필첩을 간행하였으며, 수정공 시집의 발문을 썼다.

 

 

  변사기는 위의 족보 기록과 같이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수원부사로 부임하기 전 16484월부터 164911월까지 18개월 간 통영에서 삼도수군 통제사를 맡아 나라의 바다를 지키는 장수로 헌신하였다. 효종 실록은 그를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강인한 무장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따라서 왕이 그를 재신임한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변사기는 김자점의 역모가 발생하자 그에 가담한 죄로 처형되고 만다. 이로 인해 그의 두 동생 변사강(邊士綱)과 변사경(邊士經) 그리고 그의 두 아들 변중곤(邊重坤)과 변중후(邊重后)가 유배를 가게 되고 집안이 풍비박산하게 된다.

 

  장연 변씨 족보는 그의 아들 변중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인조 임금 때 있었던 김자점의 변란 때문에 공(변사기의 아들인 변중곤)에 관한 문서기록이 실전되었다. 공의 형제가 옛 족보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나, 이제 경주 김씨(변중곤의 모친이 경주 김씨이다. 곧 변사기의 부인이 경주 김씨이다.)의 옛 족보를 살펴보고 비로소 기입한다라고.

 

  위의 족보 기록은 장연변씨 족보의 진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족보가 가짜 즉 위보(僞譜)가 아니라 진보(眞譜) 즉 진짜임을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가 바로 처가 혹은 외가의 족보 기록과 대조하여 진위를 확인하는 방법인데, 변중곤의 외가인 경주 김씨 족보의 내용을 바탕으로 변사기의 아들 변중곤과 변중후에 관해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고 언급한 점은 장연변씨 족보가 진보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파주에서 장흥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이는 변이안(邊以安)이다. 편자가 변이안과 그의 후손들이 안장된 묘역(전남 장흥군 부산면 내안리 산 61번지)에 있는 비석과 상석 그리고 문인석 및 망주석 등을 살펴 보았는데, 그것의 제작연대가 족히 수 백년은 되었을 것이로 짐작이 되는데, 그것들 중에는 몹시 큰 힘을 써서 부순 것으로 보이는 비석이나 문인석이 있다. 그 중 비석 하나는 갓이 없는데 그에 관한 변씨 가문의 구전은 매우 특징적이어서 새겨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변사기의 후손 중 관지마을에 거주하는 변한주는 변사기가 높은 벼슬을 할 당시, 정확한 이유를 알 길은 없으나 주변의 원한을 산 일이 있었던지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 비석의 목을 쳐버렸다는 말을 어려서 들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변사기가 역모로 처형되고 그의 후손과 형제들이 곤욕을 겪을 당시 그의 조상 묘까지도 역적의 조상묘라고 해서 욕을 당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구전자 변한주의 말은 역적의 자손이라는 점을 숨기고자 고위직에 있을 때 원한관계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후손들에게 둘러대려다 그의 선조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장연 변씨의 족보의 기록 중 변종탁이 쓴 파주 선산에 관한 기록을 보면, 파주 조리면에 있는 장연변씨 선산을 변장군 묘라고 주변 사람들이 불렀고 그 말이 수백 년간이나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이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조선 인조 당시 변사기 장군이 통제사로 있으면서 조상의 묘역을 찾아 참배할 때 행차가 상당히 거창했던가 보다. 그랬기에 장연 변씨 파주 선산 주변 사람들의 기억에 강한 인상이 남아 변장군 묘라는 말이 묘지기와 인근 주민들에게 전해져 왔을 터이다.

 

  게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 파주 선산의 변씨 조상묘 바로 아래에 한양의 무관인 남중곤이라는 사람이 몰래 자신의 조상을 묻어 묘지를 훔친 사건이 있고 난 후, 이를 바로 잡기 위해 후손들이 수차례 연명으로 정소한 글과, 정소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심지어 남중곤이 암장한 묘를 직접 파내 없애려다 실패하고 유배형을 받아 정배된 후손들에 관한 기록이 족보에 적힌 것을 보면 파주 선산과 장연 변씨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600여년이 넘어가는 역사적 인연라고 해야 하겠다. 요컨대 파주의 선산과 그에 관련된 후대의 여러 사건과 기록은 파주 선산이 조선 초(140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후손들이 보살펴온 오랜 유지이며, 장연 변씨 족보가 600여년의 가문의 실제 역사를 기록한 작은 역사서임을 방증하는 증거인 셈이다.

 

 

 

이전글 ...
다음글 ...